
철도마을 오미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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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마을 오미야의 역사
오미야는 어떻게 철도 도시가 되었나요?~역사탐방~
처음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왜 오미야에는 역이 없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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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우에노~구마가야 증기차 왕복의 번영을 그린 그림
*사이타마 시립박물관 제공 -
우에노와 구마가야 간 노선은 1883년에 개통되었습니다. 처음 개통 당시 역은 우에노, 오지, 우라와, 아게오, 고노스, 구마가야였습니다. 오미야 역은 노선에 없었습니다.
이는 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오미야의 인구 동향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867년에는 인구가 3,000명 정도였지만, 현청 소재지가 우라와로 이전된 영향으로 1869년에는 1,752명으로 감소했습니다.
10년 후인 1879년에는 인구가 952명까지 줄었습니다. 오미야 역의 설립은 해마다 인구가 감소하여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처음에는 연기되었습니다.
오미야에 역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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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는 구마가야 북쪽에서 다카사키까지 노선이 개통되어 우에노 - 다카사키 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다카사키 노선이 개통된 후, 도호쿠 본선 건설을 위한 분기점 선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구마가야 지점과 오미야 근처 지점으로 선택 범위가 좁혀졌습니다. 두 가지 제안이 고려되었습니다. 하나는 오미야에서 구리하시와 오야마를 거쳐 우쓰노미야까지 가는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구마가야에서 아시카가와 도치기를 거쳐 우쓰노미야까지 가는 경로입니다. 공사비, 공사기간, 운영비, 수익 가능성 등을 면밀히 검토한 후 오미야 인근 지점 설립 계획을 채택하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결정은 부분적으로 시라이 스케시치 등이 오미야에 역을 설치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에 기인한 것입니다.1885년 3월 16일, 시라이 스케시치 등의 새로운 역 유치 운동은 마침내 오미야역이 개업하면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전에는 지나가기만 하던 기차가 오미야에 정차하고, 오미야 마을의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미야 역이 개통된 후 오미야 마을은 어떻게 발전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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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 공장 설립
철도가 확장되면서 열차는 더 먼 거리와 더 높은 빈도로 운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지보수 및 서비스를 위한 철도 차량 공장이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라이 스케시치 등이 오미야 역에 철도 차량 공장을 유치하기 위한 캠페인도 성공했습니다. 1888년 일본 철도는 통신부 장관에게 오미야 역의 확장과 공장 건설을 신청했습니다.승인을 받고 1894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운영이 시작되었습니다. Sukeshichi Shirai는 역과 공장을 모두 오미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처음에는 230명 이상의 근로자가 우에노에서 공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공장이 확장되면서 최대 5,000명 정도의 직원을 고용하는 대규모 시설로 발전했습니다. 늘어나는 인력으로 인해 마을은 활기차고 분주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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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화로 인한 열차 운행대수 및 교통량 증가 대책
오미야 역 개통 후 아오모리 방면으로 철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통량이 증가했습니다.
교통량 증가와 함께 열차 운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단선 선로는 곧 운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1892년 우에노와 오미야 사이에 복선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3월 아라카와 다리의 복선화가 완공된 후, 이 노선은 복선으로 상업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교통량은 계속 증가하여 오미야는 본선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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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기반으로 한 신산업을 통한 발전
오미야 역과 오미야 공장의 개통과 복선화에 따른 수송 능력의 증가로 요코하마 항으로의 철도 접근이 더욱 편리해 져 높은 평가를 받은 제품을 수출하게 되었고, 1901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제사공장을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나가노. 그때부터 1911년까지 실크 공장이 설립되어 잇달아 조업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역 주변에서는 차 생산이 번성하여 오미야는 비단과 차를 만드는 마을로 번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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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및 산업 발전과 함께 급속한 도시화
오미야가 비단과 차를 만드는 마을로 발전하면서 오미야역 주변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도쿄 교외에 주거 지역이 개발되었습니다. 1932년에는 게이힌 도호쿠선이 운행을 시작하면서 오미야역을 이용하는 승객 수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이 지역의 도시화는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그 후, 이 도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기를 통해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운행 중인 열차의 수도 동시에 증가했습니다.
1982년, 도호쿠 신칸센이 운행을 시작하면서 오미야는 도쿄 수도권의 북쪽 관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미야는 철도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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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오미야는 처음에는 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라이 스케시치 등의 노력으로 오미야 역과 오미야 공장이 개통, 설립되면서 철도가 발달하면서 지역 산업이 생겨났습니다. 주변 지역의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 마을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오미야 역의 개통이 오미야 마을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오미야는 철도 마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고자료: 소리마치 쇼지가 쓴 코사이 출판사의 오미야 역 100년사
철도의 역사부터,
오미야는 철도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카와 신사와 함께하는 오미야의 역사~히카와 신사 주지 엔도 다네나리~
히카와 신사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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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가 위치한 고원에서는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가옥과 토기가 출토되어 약 3,000~4,000년 동안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원에서 솟아나는 담수를 위해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나 보다.
이 신사는 매우 오래된 신사로 2028년에 창립 2,500주년을 맞이합니다. 세 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 이나다히메노미코토, 오나무치노미코토입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홍수 조절의 신입니다.전국 280개가 넘는 히카와 신사의 총본사로, 쇼무 천황 시대에는 이치노미야 무사시 히카와 신사로 지정되어 조정의 숭배를 받아 왔습니다. 사무라이 시대 이후에는 가마쿠라 가문, 아시카가 가문, 호조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차례로 신사를 재건하거나 건립했습니다.
"오미야"라는 이름은 히카와 신사가 "오이나루 미야이("대신사")"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오미야는 히카와 신사의 마을로 발전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신사 주변 지역이 바뀌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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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후, 메이지 천황은 즉위 2주 만에 마차를 타고 히카와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히카와 신사 일대는 성지이므로, 국왕 폐하가 오미야에 입성하기 전 우라와에서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문을 읽고 현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1885년 오미야 역이 개통된 후 이 마을은 북쪽의 관문으로서 더욱 번화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1934년 요시다 하쓰사부로가 그린 이 지역의 조감도에는 철도와 오미야 공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이 늘어선 오미야 공원, 비단 공장(현재 가타쿠라 산업), 경마장 등이 있는 유토피아적인 마을 풍경을 보여줍니다.
덧붙여서, 쇼와 천황이 초등학교 시절에 신사 옆 오미야 공원으로 견학을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 송이버섯 따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요시다 하쓰사부로: 수도 외곽의 유일한 유토피아, 오미야의 조감도
히카와 공원을 중심으로 한 오미야 지역의 조감도(요시다 하츠사부로)
이 그림은 완성하는 데 2개월이 걸렸으며, 당시의 오미야 공원, 오미야 철도 공장, 가타쿠라 실크의 모습을 중심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당시 한 신문은 “광범위한 홍보를 위해 2만 부가 인쇄되어 철도부 국제관광국, 일본 관광국, 임페리얼 호텔 및 기타 기관에 배포됐다”고 기술했습니다. *동일한 조감도의 복제품이 히카와 신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미야 역이 개통된 후
철도와의 교류도 증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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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도쿄의 유명 작가와 유명인이 일본 국철의 일등석을 타고 반딧불이를 보며 료테이(고급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편, 분재 마을에 살았던 오토 모리(오가이 모리의 장남)는 오미야역에서 도쿄대학 의과대학에 가기 전에 매일 아침 히카와 신사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오미야 공장이 왕실 열차를 제작할 때 200명 이상의 궁궐 목수가 참여했습니다. 열차 안에는 신사와 삼신보를 보관하는 선반이 있어 그야말로 '움직이는 신사'였습니다.
전쟁 중에 철도 유지 보수 인력이 오미야 공장에서 시베리아로 파견되었습니다. 출국식은 히카와 신사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베리아 개항을 기념하는 대형 사진이 현재까지 신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에서 일반에 공개되는 히카와마루도 히카와 신사에서 나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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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히카와 신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히카와 마루는 오미야의 비단 공장에서 생산된 비단을 외국으로 운송했습니다.
오미야 역이 개통되면서 비단 생산지인 북간토와 생사를 수출하는 요코하마항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오미야에 많은 비단 공장이 설립되었습니다. 이것이 이곳의 실크 산업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쇼와 시대 초기에 미노리카와 나오사부로가 발명한 기계로 방적된 비단은 유럽과 미국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최고급 비단 실은 오미야에서 요코하마까지 철도를 통해 운송되었고, 요코하마에서 히카와 마루를 통해 시애틀까지 운송되었습니다. 이후 그레이트 노던 철도를 비롯한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면서 비단은 시애틀에서 뉴욕과 워싱턴 D.C.로 운송되었습니다.
히카와 신사의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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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와 신사로 이어지는 히카와산도 참배길은 일본에서 가장 긴 참배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이타마 신도신역에서 도보 약 10분 거리에 있는 이치노 도리이(제1 도리이)에서 산노 도리이(제3 도리이)까지 약 2km입니다. 이치노토리이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사이타마신토신역이고, 신사 경내 산노토리이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오미야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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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와 신사의 두 번째 도리이는 일본 최대의 노송나무 도리이입니다. 원래는 대만 아리산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잘라 아리산 철도로 운송한 후 타이베이에서 배를 타고 운송한 것입니다. 1920년에 메이지 신궁에 봉헌되었으나, 1975년에 히카와 신사로 옮겨졌습니다.